코로나19 인권영화제:
누구도 남겨두지 않는다
상영작
[코로나19 인권영화제: 누구도 남겨두지 않는다]는 총 9편의 인권영화를 상영합니다. ‘여는 영화’로 <문 밖으로: 자유를 위한 투쟁>을, 그 다음으로 <컨베이어벨트 위의 건강>, <(테)에러>, <청소>, <야간근무>, <피난하지 못하는 사람들>, <멈출 수 없는 청년들>, <사고 파는 건강>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잇는 영화’로 <퀴어의 방>을 상영합니다.
청도대남병원 폐쇄병동의 집단감염으로부터, 비로소 우리는 재난 앞에서 평등하지 않고, 똑같이 아프지 않다는 사실을 뼈아프게 확인했습니다. <문 밖으로: 자유를 위한 투쟁>을 ‘여는 영화’로 선정한 이유입니다. 각국의 공공의료체계는 부실함을 드러냈고, 택배노동자는 하나둘씩 쓰러졌습니다. 재난은 원래도 더 취약했던 곳을 더 강하게 치고 지나가는 중입니다.
그런데 질병의 위협이 모두에게 같지 않은 것처럼, ‘안전한 공간’의 의미 또한 모두에게 같지 않습니다. 이미 ‘정상적인 가족’의 공간인 ‘집’에서 지속적으로 존재를 위협받았던 ‘비정상적’ 퀴어들이 있습니다. 이태원 클럽에 확진자가 다녀갔다는 이유로 모욕의 대상이 된 이들에게 “집에 있으라”는 권고는 과연 ‘안전한 권고’일까요? ‘잇는 영화’로 <퀴어의 방>을 내놓게 된 이유입니다.
물론 코로나19를 겪으면서 우리는 이 이야기들로도 다 전할 수 없는 수많은 ‘취약점’들을 만났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누구도 남겨두지 않고’ 모두가 온전히 안전한 세상을 상상하기 위해 ‘라이브 토크’ 세션을 따로 마련했습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잠시 멈춤’의 방식이 아니라 ‘무엇이라도 하는 방식’으로 코로나19를 헤쳐나가보려는 서울인권영화제의 고민에 많은 분들이 동참할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문 밖으로: 자유를 위한 투쟁
스스로의 삶을 살기 위한 '자격'을 증명하라는 국가가 있다. 틴스코이 장애인수용시설의 사람들은 국가에 맞서 박탈당한 삶을 되찾기 위해 투쟁한다.

컨베이어벨트 위의 건강
질병에 가격이 매겨지고 병원은 살아남기 위해 경쟁해야 한다. 우리는 의료 앞에서 환자가 아니라 ‘구매자’가 된다. 점점 공공성을 잃어가는 의료 산업화에 의문점이 생긴다. 질병에 가격을 매길 수 있을까?

(테)에러
테러 예방을 목적으로 하는 민간인에 대한 감시, 그 결과 밝혀지는 것은 테러인가? 에러인가? 우리의 페이스북, 핸드폰 메시지, 집에 있는 책들의 목록까지도 감시에서 자유롭지 않다.

청소
박근혜정권 퇴진운동이 한창이던 시기, 광장에서 소리 높여 변화를 외치는 그 순간, 다른 공간에는 보이지 않는 노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어느 비정규직 지하철 청소노동자는 이렇게 말한다. “근데 대통령 하나 바뀐다고 세상이 달라지겠습니까, 저는 사실 큰 기대는 안합니다.” 우리가 바라는 새로운 세상은 모두에게 새로운 세상일까?

야간근무
공장에서 일하는 린은 잦은 '야간 근무'에 시달리지만 동료 연희가 있어 외롭지 않다. 어느날 린은 연희와 주말에 바다에 가고 싶어 한다. 그렇지만 공장장은 이주노동자들에게 주말 휴가를 내어줄 생각이 없다. “한국 사람들은요?”라고 되묻는 린의 시선에서, 한국은 연희에게 기회가 많은 땅이다. 그렇지만 연희는 또다른 꿈을 품고 호주행 워홀을 떠나려고 하는데…

피난하지 못하는 사람들
동일본 대지진에 이은 쓰나미,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로 피해를 입은 장애인의 증언을 기록한다. 몇십 년 동안 만들어 온, 자신이 안전할 수 있는 공간은 한순간에 위험지역이 되었다. 장애인은 자신의 공간에 남든, 대피소로 피난을 가든 결정을 해야 했다. 대지진으로부터 1년, 감독은 그들의 삶을 다시 찾아간다. 재난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멈출 수 없는 청년들
<멈출 수 없는 청년들>은 코펜하겐 기후회의부터 시작해 트럼프까지 이어지는 오랜 연대와 운동을 따라간다.

사고 파는 건강
약 공급을 제약회사에 맡겨두는 시스템에서 우리는 질병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세계무역기구의 트립스(TRIPS, 무역관련지식재산권협정)는 제약회사에 20년의 특허를 주어 시장에서 독점적으로 약을 공급할 기회를 부여한다. 건강을 사고 파는 구조에 대한 문제제기 없이 모두를 위한 건강은 실현될 수 없다.

퀴어의 방
나는 나의 정체성에 대한 혐오와 폭력으로부터 도망치게 된다. 내가 '나'로 온전해지는 곳, 사회의 '정상성'에 맞서는 여기는, “퀴어의 방”이다. 질병 앞에서도 우리의 '비정상성'이 지켜질 수 있는 공간은 존재하는가?
